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바르샤바 봉기 (문단 편집) == 봉기군의 구성 == ||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" [[파일:external/upload.wikimedia.org/250px-Bor.jpg]]}}} || || 부르코모로프스키의 사진 || 폴란드 국내군과 민족주의 성향의 민족방위군(Narodowe Siły Zbrojne), 공산주의 성향의 폴란드 인민군(Armia Ludowa)이 힘을 합쳐서 20,000-45,000여 명의 대규모의 봉기군(Uprising Armed Forces)을 편성하였다. 그들 중 2,000-3,500여 명은 민족방위군 소속이었고 수십여 명은 인민군에 소속되어 있었다. 8월 중반부터는 바르샤바 [[게토]]에서 해방된 [[유대인]]들도 봉기에 참여했다. 이미 [[가톨릭]] 폴란드계로 구성된 유대인 구출조직 제고타(Zegota)가 전쟁 기간 동안 약 6만여 명의 유대계 시민들을 구출한 전력이 있었다. 폴란드 봉기군(Polish Uprising Armed Forces)이 [[소련]]으로부터 지원을 받으리라는 상당히 낙관적인 희망을 가진 것은 그 동안 소련의 반응을 보고 판단한 것이었다. 실제로 [[모스크바]]에 위치한 폴란드 방송국에서는 폴란드 국내군에게 계속 봉기를 선동하는 방송을 하였으며, 외곽에서는 소련군이 거의 바르샤바 시내로 곧 진입할 것처럼 빠르게 진격해오고 있었던 것이었다. 7월 31일, 봉기 지도자들이 바르샤바에 모여 회합을 가졌고, 그들은 다음 날 8월 1일 오후 5시에 봉기를 개시하기로 하였다. 봉기군은 그 때까지 충분한 양의 무기를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이는 결정적인 실책이었다.[* 일각에서는 '소련군이 바르샤바를 함락하기 전에 폴란드의 독립 의지를 제대로 선보여야 한다'는 판단을 봉기 강행의 원인으로 분석한다. [[3.1 운동]]이 비록 실패했지만 상당한 역사적 의의를 남기고 [[대한민국]]의 정통성과 국가 정체성 수립에 기여했듯이 바르샤바 봉기의 정치적, 역사적 의의를 근거로 이 결정을 100% 실책만으로 볼 수는 없다는 관점도 존재한다. 또한 [[폴란드 분할|역사적]][[소련-폴란드 전쟁|으로나]] [[폴란드 침공]] [[독소 폴란드 점령|전후의 행적으로]] [[카틴 학살|봤을 때]] 폴란드가 전후 협상 테이블에서 동등한 연합국 지위를 획득하지 못한다면 폴란드의 자주독립은 소련군정에 의해 유린될 것이 뻔한 상황이었다. 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일본군을 상대로 참전하고자 했던 것과 유사하다.] 봉기 직전 바르샤바 곳곳에서 파열음이 튀어나와서 독일군과 이따금씩 소규모 교전들을 벌였다. 봉기의 최고 지도자는 타데우시 부르코모로프스키(Tadeusz Bór-Komorowski, [[1895년]] [[6월 1일]] ~ [[1966년]] [[8월 24일]])였는데 그는 국내군 최고 지도자이기도 했다. 부르코모로프스키는 폴란드 왕국 시기부터 이어진 군인 귀족 출신이었다. 이 봉기가 실패하고 사로잡혀 복역한 그는 2차 대전이 끝나고 영국으로 망명하여 반공 투쟁에 나섰으나 끝내 [[런던]]에서 사망했고 [[폴란드 인민 공화국|폴란드]]가 민주화된 1994년에서야 조국에 묻혀졌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